세계 최대 산유 기업 사우디 아람코가 시장의 예상을 보기 좋게 깼다.
10일(현지시간) 아람코는 올해 1분기 조정 순이익이 약 1,260억 리얄, 미화로 환산하면 336억 달러에 달했다고 발표했다. 1년 전 같은 기간(975억 리얄) 대비 26% 급증한 수치이자, 시장 예상치 1,090억 리얄을 큰 폭으로 상회한 '서프라이즈' 실적이다.
이번 호실적의 배경에는 단 하나의 키워드가 있다. 바로 '전쟁'이다.
호르무즈 막히자, 유가 급등… 아람코는 우회로로 돌렸다
지난 2월 28일 시작된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간 군사 충돌은 전 세계 에너지 시장을 단숨에 흔들었다. 이란이 사실상 호르무즈 해협 봉쇄에 나서면서, 글로벌 원유 공급의 약 5분의 1이 지나가던 길이 막혔다. 시장은 곧장 패닉에 빠졌고, 국제 유가는 단기간에 가파르게 치솟았다.
아람코 입장에서는 위기이자 기회였다.
평소 호르무즈 해협을 통해 페르시안 걸프 쪽으로 원유를 실어 나르던 사우디는, 즉시 수출 경로를 서쪽 홍해의 얀부(Yanbu) 항구 쪽으로 돌렸다. 이를 가능케 한 것이 바로 사우디 동부에서 서부를 가로지르는 'East-West 송유관'이다.
아민 나세르(Amin H. Nasser) 아람코 CEO는 이 송유관이 현재 하루 700만 배럴이라는 최대 가동 용량으로 풀가동 중이라고 밝혔다. 그는 "글로벌 에너지 충격을 완화하는 핵심 공급 동맥 역할을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매출 7% 증가… 가격·물량 모두 호조
수치를 좀 더 들여다보면 이번 실적이 단순한 '유가 효과' 이상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총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약 7% 늘어난 1,154억 9천만 달러. 원유뿐 아니라 정제유, 화학제품까지 가격과 판매량이 모두 올랐다. 다만 사우디는 이란의 호르무즈 봉쇄 직후 하루 200만 배럴 규모로 생산을 줄였다. 수출 병목이 생긴 탓에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
그럼에도 가격 상승 폭이 워낙 컸기에, 줄어든 물량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았다.
시장 반응: "지정학 리스크의 최대 수혜주"
월가와 두바이 금융가의 시선은 차갑고도 명확하다. 이번 실적은 지정학 리스크가 그대로 산유국의 이익으로 환산된 결과라는 평가다.
투자자들이 주목하는 포인트는 세 가지다.
첫째, 배당 여력. 아람코는 사우디 정부 재정의 핵심 동맥이다. 빈 살만 왕세자가 추진하는 비전 2030 프로젝트, 네옴시티 등 초대형 사업의 자금줄도 결국 아람코 배당이다. 이번 호실적은 그 펌프가 다시 풀가동에 들어갔다는 의미다.
둘째, 운영 유연성. 송유관 한 줄로 호르무즈 봉쇄를 어느 정도 막아낸 것은, 글로벌 메이저들 사이에서도 흔치 않은 '인프라 헷지'다. 이는 향후 중동 리스크가 발생할 때마다 아람코가 상대적 안전판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셋째, 유가 하방 경직성. 전쟁이 끝나도 호르무즈 항로의 보험료, 운임은 단기간에 정상화되기 어렵다. 시장이 한동안 '리스크 프리미엄'을 유가에 얹은 채로 갈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한국 시장에는 어떤 영향이?
이번 뉴스는 단순히 중동 한 기업의 실적 발표로 끝나지 않는다. 한국 경제와 증시에도 직간접적 파장이 적지 않다.
가장 먼저 영향을 받는 곳은 정유·석유화학 업종이다. 국제 유가가 높은 수준에서 유지되면 정제 마진은 단기적으로 좋아질 수 있지만, 원가 부담도 함께 커진다. 특히 사우디산 원유 의존도가 높은 한국은 도입 단가 상승을 피하기 어렵다.
항공·해운 업종은 부담이 더 직접적이다. 항공유 단가 상승은 곧 항공사 수익성 악화로 이어진다. 해운 쪽도 호르무즈·홍해 항로 보험료가 크게 뛰면서 운임 변동성이 확대되는 흐름이다.
반대로 방산주와 에너지 인프라 관련주는 수혜 가능성이 점쳐진다. 중동 리스크 장기화는 결국 무기 수요와 비(非)호르무즈 에너지 인프라 투자 확대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원·달러 환율과 국내 물가도 변수다. 유가가 일정 구간 위에서 굳어지면, 수입 물가를 통한 인플레이션 압력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 한국은행의 금리 경로에도 미묘한 변화를 줄 수 있는 대목이다.
앞으로 체크할 포인트
투자자 입장에서 향후 짚어야 할 변수는 분명하다.
먼저 호르무즈 해협 정상화 시점이다. 이란의 봉쇄가 풀리는 순간, 유가는 상당 폭 조정받을 수 있다. 반대로 봉쇄가 장기화되면 브렌트유가 배럴당 100달러를 넘는 시나리오도 다시 거론될 수 있다.
다음은 OPEC+의 증산 결정이다. 사우디가 줄였던 200만 배럴을 언제, 얼마나 되돌릴지가 핵심 변수다. 단순 복귀가 아니라 시장 점유율 회복을 노린 공격적 증산이 나올 경우, 유가는 빠르게 안정될 수도 있다.
마지막은 아람코의 다음 분기 가이던스와 배당 정책이다. 사우디 정부가 비전 2030 자금 수요를 맞추기 위해 특별 배당 카드를 다시 꺼내들 수 있을지 시장은 이미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다.
전쟁이 만든 호황은 달콤하지만, 결코 오래 가지는 않는다. 지금 시장이 던지는 진짜 질문은 단순하다. "이 흐름은 어디까지, 그리고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가."
투자자라면, 다음 OPEC+ 회의와 중동 외교 라인의 움직임에서 눈을 떼서는 안 될 시점이다.